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돌아온 세린 기자입니다.
여러분은 역사에 관심이 많나요? 저는 요즘 근현대사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럼, 오늘은 저 세린이가 직접 보고 온 명동의 근현대사 발자취를 따라가 볼까요?
가장 먼저 나석주 열사 의거 기념터에 가보았습니다. 나석주 열사 의거 기념터는 1916년 나석주 열사가 일제 동양척식회사에 투탄하고 일본경찰과 총격전 중 자결한 곳입니다.
< 나석주 열사 >
나석주 열사(1892~1926)는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강탈당한 주권과 자유와 경제를 되찾기 위하여 1926년 12월 28일 경제침략의 본거지인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총격을 가한 후 장렬하게 자결하여 우리 겨레에게 민족혼을 일깨우고 세계 만방에 일제의 수탈을 고발하였다.나열사는 최후의 순간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였다. '2천만 민중아 쉬지말고 분투하라'고 절규하였다고 전한다.
두 번째로 명동 문화공원을 가보았습니다. 명동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이 지역을 가리키던 이름인 명례방에서 유래되었는데, 당시 명례방에서는 종현(종고개), 이현(진고개), 동현(구리개) 등 여러 고개가 있었습니다. 종현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가 주둔하며 숭례문에 있던 종을 걸어둔 데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1898년에는 명동성당이 들어섰습니다. 진고개는 땅이 질어서, 구리개는 흙이 구릿빛이어서 붙은 이름으로, 약방이 즐비했다고 합니다.
또, 600년 수도 한양의 한복판에 위치했던 만큼, 명동에는 여러 명문가의 집터가 남아있습니다.
19세기 말 국난의 시기, 경주이씨 명동 저택에서는 조상의 의기를 물려받은 인물들이 태어났습니다. 이항복의 10대손인 독립운동가 이회영(1867~1932), 이시영(1869~1953) 형제가 그들입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후 이회영, 이시영을 포함한 6형제는 가문의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났습니다. 처분한 재산은 40여만 원으로, 당시 소 13,000마리를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고 합니다. 현재 가치로는 수백억 원에 이르는 엄청난 돈입니다.
이후 이회영은 일본 경찰에 체포당하여 순국했으며 다른 형제들도 모두 망명지에서 사망했습니다.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이시영이 유일하게 살아남아 광복 후 초대 부통령으로 지냈습니다. 이회영, 이시영 형제가 보여준 조선판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 큰 교훈을 전하고 있습니다.
1969년 명동의 모습과 현재 명동의 모습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사진도 있었습니다.
이회영, 이시영 6형제 집터도 가보았는데요. 독립운동을 위해 전 재산을 처분했다는 사실이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이재명 의사 의거터와 명동 대성당도 있으니 한 번쯤 방문해 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지금까지 세린 기자와 함께한 근현대사 알아보기 어떠셨나요? 어렵게 느껴졌던 근현대사가 재미있게 느껴집니다! 다음에는 더 재미있는 주제로 돌아오겠습니다. 이상, 명동 근현대사 발자취를 따라가 본 세린 기자였습니다!